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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의 노포 탐방기: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by 다나튜터 2025. 4. 21.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 여전히 시간을 천천히 살아가는 곳이 있다. 충남 서천의 오래된 밥집, 소박하지만 깊은 맛이 있는 그곳에서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 한 끼를 마주했다. 반찬 하나에도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밥상 너머로 사람의 온기가 전해지는 순간들. 이 글은 그런 서천의 노포에서 느낀 따뜻한 밥상의 기억을 담은 조용한 기록이다.

오래된 간판 아래, 시간이 머무는 식당을 만나다

충남 서천의 노포 탐방기: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충남 서천의 노포 탐방기: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충남 서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읍내 중심으로 들어서자, 마치 시간이 몇십 년은 느리게 흐르는 듯한 거리 풍경이 펼쳐졌다. 반듯하게 자란 가로수, 오래된 간판, 사람보다 더 오래된 듯한 간이 의자. 그 안에는 아직도 ‘시간이 머물러 있는’ 곳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한 식당이 있었다. 간판엔 ‘○○식당 – 1975년부터’라고 적혀 있었고, 창가에는 희미하게 바랜 커튼이 걸려 있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니, 따뜻한 된장 냄새와 오래된 나무 식탁의 향기가 동시에 밀려왔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가게 안에는 손님이 몇 명 있었지만, 다들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걸 보니 이곳은 단골들이 찾는 ‘동네 밥집’ 같았다. 벽에 손글씨로 적힌 메뉴판은 단출했다. 백반, 청국장, 제육볶음, 그리고 계절별 나물 반찬. 요즘 말로 ‘할머니 집 밥상’이라고 해야 할까.

주인 할머니는 허리가 굽었지만 씩씩한 목소리로 “혼자 왔어요? 밥 먼저 줘야지”라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백반이 기본인 듯, 밥상 하나가 금세 내 앞에 차려졌다. 그 밥상엔 그날 아침에 직접 무쳤을 것 같은 나물들과, 구수한 청국장, 조촐한 생선구이, 그리고 갓 지은 밥이 올려져 있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정성껏 차려준 느낌. 그건 돈을 주고 사는 ‘식사’라기보단, 마음이 담긴 ‘대접’ 같았다.

반찬 하나에도 담긴 삶의 이야기, 밥이 말을 걸다

밥상 위에 오른 반찬들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놀랍도록 정갈하고 맛이 깊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들깨 무나물. 살짝 익힌 무에 고소한 들깨가루가 입혀져 있었는데, 젓가락이 계속 갔다. 그 맛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어릴 적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반찬과 너무 닮아 있어서였다.

그 순간 나는 입이 아니라 기억으로 밥을 먹고 있었다. 각 반찬 하나하나가 할머니의 손맛, 삶의 결이 느껴졌다. 직접 담근 것 같은 된장으로 끓인 청국장은 향은 강했지만 맛은 부드러웠고, 열무김치는 배추김치보다 더 시원하게 입안을 씻어줬다.

할머니는 나중에 자리로 오셔서 말없이 반찬을 한두 개 더 얹어주셨다. “이거, 오늘 아침에 내가 무친 거야. 요즘 사람들 이런 거 안 먹지?”
나는 고개를 젓고는 “아니에요, 진짜 맛있어요. 엄마가 해준 밥보다 더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엄마보다 맛있으면 큰일인데~”라며 조용히 주방으로 돌아가셨다.

그 순간 느꼈다. 이곳에서 먹는 밥은 단지 배를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과 기억, 정성과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하나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나는 지금 맛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묵묵히 살아온 시간의 무게가, 조그만 반찬 하나에도 담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밥을 먹고 난 뒤, 돌아가는 길이 더 느려졌다

배가 부르다고 느낀 건 식사가 끝난 지 한참 후였다. 그만큼 나는 그 자리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손님들이 나가고 할머니가 바닥을 쓸며 조용히 식당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그 장면에 빠져들었다. 식사라는 행위가, 이곳에선 단지 소비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식당 앞에 나와 천천히 걸었다. 마을은 조용했고, 도로 옆에는 봄기운이 완연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충남 서천’이라는 이름은 내게 낯설었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은 낯설지 않았다. 아마도 사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밥을 사 먹는다는 행위는 어쩌면 익숙하고 반복되는 일일지 몰라도, 누군가가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해 밥을 차려준다는 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일상적인 호사(豪奢)다.

서천의 노포는 그런 호사를 아무렇지 않게 내게 선물해줬다. 오래된 식탁과 익숙한 된장 냄새, 말이 없어도 따뜻한 눈빛을 건네는 할머니.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남았고, 돌아가는 내 걸음은 그만큼 더 느려졌다.

식당을 나오며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을 때,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부르면 됐지, 또 와요. 날 더워지면 시원한 냉국도 해줄게.”
그 말 한마디가 하루 종일 따뜻하게 남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이곳을 찾게 될 것이다. 밥 한 끼의 진심이 그리울 때면, 충남 서천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