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이는 관광 대신, 조용한 하루를 보내고 싶을 때 단양의 마을서점은 안성맞춤의 선택이다. 책 향기 가득한 작은 공간에서, 독서와 사색, 그리고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채우는 시간. 이번 글에서는 녹음 짙은 단양의 마을 골목 끝, 작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서점에서 보낸 하루를 담아봤다. 잠시 멈춰 서고 싶은 당신께 이 이야기를 전한다.
단양 골목 끝에서 만난 작은 서점, 그 첫 인상
단양은 흔히 만천하스카이워크, 도담삼봉, 단양팔경 같은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조금 달랐다. 소박한 마을 골목 끝에 자리한 작은 서점 하나. 검색해도 잘 나오지 않는, 마치 동네 사람들만 아는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서점의 이름은 ‘숨책방’. 입구에는 손으로 쓴 조그만 간판 하나와, 그 아래 작은 화분들이 서점의 분위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은은한 나무 향과 책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고요한 음악과 함께 작은 조명 아래 배열된 책들은 베스트셀러보다는 독립 출판물, 시집, 에세이 위주였다. 책장 사이로 흘러나오는 빛, 나지막한 대화 소리, 그리고 책장 넘기는 소리까지… 모든 것이 조용하지만 생동감 있었다. 이곳은 ‘조용한 쉼’을 위한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책방 주인은 젊은 부부였다. 서울에서 내려와 단양에 정착한 지 3년째라고 한다. “단양은 관광객이 많지만, 하루쯤은 북적이지 않은 곳에서 쉬고 싶은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그 분들이 책 한 권 들고 하루를 보내기 좋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실제로 이 서점은 책을 사러 오는 사람보다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이 더 많다고 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이 작은 서점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루를 천천히 보내도 된다고 말해주는 쉼의 장소였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조용한 거울 같은 공간이었다. 관광보다 ‘머무름’을 택하고 싶은 여행자라면, 단양의 마을서점은 그 자체로 목적지가 될 수 있다.
책장 사이에서 만난 이야기들
숨책방 안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혼자 여행을 온 듯 보였고, 또 어떤 이들은 지역 주민처럼 보였다. 모두 조용히, 그러나 집중해서 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도 자연스럽게 한 권의 에세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문장은 단순했지만, 서점 안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마음속에 조용한 울림을 남겼다.
책을 읽다 말고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점 뒤로는 작은 산과 논이 보였고, 봄 햇살이 그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읽는 책은, 도시의 카페나 도서관에서 읽는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문장이 더 깊이 다가오고, 나만의 해석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이 서점에서의 독서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감성적 체험이자 명상 같은 시간이 되었다.
책 사이에는 손님들이 남긴 짧은 메모들도 가끔 끼워져 있었다. “여기서 이 책을 만나 다행이었어요.”, “여행의 끝에 이곳이 있어 고마웠습니다.” 같은 문장들이었고, 그 하나하나가 마치 이 공간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나는 메모지를 꺼내 ‘오늘, 나에게 필요한 문장은 여기서 찾았다’고 적었다. 익명으로 남긴 이 기록들이야말로, 마을서점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한 교감이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가끔 작가 초청 북토크나 작은 낭독회도 연다고 했다. 단양에 살고 있는 주민, 서울에서 온 문학 애호가, 우연히 들른 여행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책을 중심으로 소통한다고 했다. ‘서점은 사람을 모으는 공간’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책장 사이에서 만나는 이야기는 책 속 문장뿐 아니라, 이곳을 찾은 사람들 하나하나의 삶이기도 했다.
하루의 끝, 서점에서 맞이한 저녁 풍경
책방에 오래 머물렀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조용한 독서의 시간이 무겁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서점 주인은 오후 6시가 지나자 조명을 하나둘 낮추고, 은은한 재즈 음악을 틀었다. 공간이 마치 책 속의 장면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해 질 무렵의 서점은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조용히, 하루가 저물어 가는 시간을 이곳에서 맞이하게 된 것이 왠지 감사하게 느껴졌다.
주인은 저녁 무렵이면 무료로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놓는다고 했다. 직접 말린 단양산 감잎차였다. “이 시간엔 손님이 많이 없기도 하고요, 하루를 잘 보냈다는 의미로 작게 나누는 차예요.” 그 따뜻한 차 한 모금에 마음마저 데워졌다. 여행지에서 이렇게까지 차분하고 편안하게 저녁을 맞이한 건 참 오랜만이었다.
서점 밖으로 나서기 전, 다시 한 번 책장을 훑어봤다. 처음엔 그저 조용한 공간이 필요해 들른 곳이었지만, 나갈 때는 무언가 채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책을 샀거나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았어도, 이곳에서의 하루는 특별했다. 사람의 목소리 대신 종이 냄새와 햇살, 그리고 잔잔한 음악이 나를 위로해준 하루였다.
서점 문을 나서며 뒤돌아봤다. 불이 희미하게 켜진 채 조용히 서 있는 그곳은, 다시 돌아오고 싶은 장소로 마음에 새겨졌다. 단양의 마을서점에서 보낸 하루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삶에 잠시 쉼표를 찍고 다시 나아가게 해주는 귀중한 시간이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