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진짜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일까? 경북 봉화의 작은 마을에서 만난 80세 할아버지와의 뜻밖의 대화는, 자연보다 사람의 이야기가 더 깊게 남는 여행이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이번 글에서는 농사와 함께 평생을 살아온 한 어르신의 삶과 지혜,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따뜻한 교감의 순간들을 담았다.
담장 너머로 들려온 인사, 첫 만남의 시작
경북 봉화는 처음부터 따뜻하게 다가오는 고장이었다. 대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한적함과 고요함, 그리고 사람 냄새 나는 마을 풍경이 곳곳에 스며 있었다. 봉화의 한 작은 마을을 걷던 중, 오래된 돌담 너머로 정성스레 장독대를 닦고 계신 할아버지를 우연히 마주하게 되었다. 나지막하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드렸더니, 그분은 손에 묻은 물기를 털며 환한 미소로 “어이구, 나그네 왔는갑네. 들어와 차 한 잔 하시구려.” 하셨다.
그렇게 불쑥 마당에 들어서게 된 것이, 80세 김정호 할아버지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의 집은 수십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초가집 형태였고, 마당 한편에는 봄 햇살을 머금은 배추와 마늘이 널려 있었다. 아궁이에 장작을 넣으며 삶을 이어가는 그 공간은, 도시의 세련됨은 없었지만 대신 편안함과 깊은 정이 가득했다.
잠시 앉아 쉬라는 말에 이끌려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마시는 따뜻한 둥굴레차 한 잔은,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말투는 투박했지만, 그 안에 스며든 환대와 따뜻함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느긋하게 앉아서 이야기 나눌 일이 없다 그지?”라는 말씀에 웃음이 나면서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었지만, 그 만남을 통해 나는 봉화라는 고장이 단지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삶이 고요히 흐르고 있는 ‘사람의 마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서 이곳의 진짜 매력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평생 흙을 일군 손, 삶의 깊이를 마주하다
차를 마시며 조용히 앉아 있는 사이,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이 마을서 태어나 이 마을서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았지. 서울은 구경도 못 해봤어.” 그 목소리에는 후회보다는 묵직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80평생을 논과 밭에서 보낸 삶. 누군가에겐 평범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분의 얼굴에는 그 어떤 직업군에서도 보기 어려운 단단한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할아버지의 손은 거칠고 검게 그을려 있었다. 어릴 적부터 농사일을 하며 손으로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고, 작물을 키워온 삶. 그 손으로 자식 셋을 대학까지 보냈고, 지금은 손자까지 대학을 다닌다며 조용히 웃으셨다. “나는 글은 몰라도 흙은 안다. 흙은 정직하거든.” 그 한마디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계절마다 바뀌는 밭의 풍경, 우박이 떨어지던 해의 기억, 가뭄에 농작물을 못 거두던 해의 고통, 그리고 수확의 기쁨까지—그분은 인생을 자연과 함께 견뎌낸, 진짜 ‘농부’였다. 대화는 점점 깊어졌고, 나는 어느새 질문보다 듣는 쪽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마치 옛날 이야기 속 주인공을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소설보다도 풍성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진짜 깊은 삶이란, 어디를 얼마나 다녔느냐가 아니라, 한 곳에서 얼마나 오래 버텨왔느냐일지도 모르겠다.’ 봉화에서 만난 80세 농부의 하루는, 그렇게 내게 삶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고요한 마을, 오래된 이야기의 끝자락에서
해가 서서히 산 너머로 기울기 시작하고, 마을 전체가 조용히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마당에서 함께 감자를 까며 이야기를 나누던 할아버지께서 “이제 집에 가야지?” 하며 웃으셨다. 짧은 인사처럼 들렸지만, 그 말에는 오늘 하루 함께한 시간을 향한 따뜻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낯선 여행자가 아닌, 잠시 들른 이웃을 대하듯 말이다.
마을 어귀까지 나를 배웅해 주시던 할아버지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이야기를 누가 기억해 줄지 몰랐는데, 당신이 이렇게 들어줘서 고맙소.”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할 자리였지만, 그 말에 울컥했다. 도시의 빠른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는 때로, 누군가의 인생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는 것조차 잊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봉화의 마을은 그날 이후로 내게 특별한 이름이 되었다. 단순한 여행지 이상의 의미. 사람을 만나고, 삶을 느끼고, 마음이 물드는 곳. 80세 할아버지의 하루가, 그분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아마도 다음에 또 봉화에 간다면, 제일 먼저 그 마을 골목을 걸어볼 것 같다. 그리고 그 집 앞 장독대 옆에 서서, “할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하고 다시 인사를 드릴 것이다.